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녹산의 난 (문단 편집) ==== 하남: 수양, 남양의 방어 ==== 하동지역에 비해 하남, 남하[* [[호북성]], 형주지역으로 잘 알려져 있다.]지역은 상대적으로 전란이 비켜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수양(誰陽, 하남성 상구시)을 지켜낸 [[장순(당나라)|장순]], [[남양]](南陽, 하남성 등주시)을 수비한 노경이 연의 침공을 막아서는 방패가 되었기 때문이다. 노경이 남양을 수비하기 시작한 것은 756년 5월부터였다. 전진하여 목책을 세웠다가 무령순, 필사침의 공세에 패배해 남양성으로 들어가 수비하기 시작했던 것. 이후 무령순, 필사침, 전승사 등의 공세에서 남하지역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노경은 필사적으로 남양을 수비한다. 그리고 이 방어전는 1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계속된다. 747년 4월, 남양에는 식량이 고갈되었다. 하도 먹을 것이 없어서 쥐 한마리 가격이 동전 수백에 달했다고 한다. 이에 당숙종은 환관장군[* 환관으로써 장군의 일을 담당하게 하여 붙여진 명칭.] 조일승을 파견해 남양성을 격려하고자 했다. 그러나 연군의 포위망이 강고했기 때문에 쉽게 들어가긴 힘든 상황. 양양태수 위중서는 조일승이 연군에 의해 피살당할까 두려워 보내지 않았다. 이때에 하북에서 사사명에게 패해 남하지역으로 와 있었던 안진경이 조일승이 남양으로 가는 것을 막지 말라고 조언한다. 이런 조언이 가능한 것은 안진경은 4월 즈음에는 영무로 가기 때문에 조일승은 4월 이전에 양양에 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위중서는 조일승이 남양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고, 기병 10기를 호위병력으로 붙인 조일승은 연군의 포위망을 뚫고 무사히 남양에 도착해 이들을 격려한 후 양앙으로 되돌아온다. 이때에 남양에 식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안 조일승은 호위병력 1천여 명을 붙여 양양에서 식량을 가져와 당장의 주린 배를 채울 수 있게끔 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경은 더이상은 남양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4월 15일에 휘하 병력을 이끌고 남양을 탈출, 양양으로 철수한다. 이에 [[전승사]]는 노경을 추격했지만 잡지 못했다고 한다. 남양의 함락 이후 연 세력은 남하지역 또한 공격하고자 했으나 노경이 요충지를 잡고 잘 수비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수비전은 수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안경서는 윤자기를 변주자사·하남절도사로 삼고 하남지역까지 제압할 것을 명령했고, 1월 25일 윤자기는 규주(하북성 회내현)와 단주(북경시 밀운현)의 단결병들, 그리고 동라와 해족 출신 이민족 병사들을 합처 13만에 달하는 병력을 편성, 수양으로 진격한다. 이에 수양태수 허원이 영릉으로 물러나 있던 장순에게 도움을 청하자 장순은 자신이 이끌던 병력 3천여 명과 함께 수양으로 이동, 허원이 지휘하던 병력 3천 800여 명과 이를 합친다. 이 7천여밖엔 안 되는 병력으로 장순은 다시한번 뛰어난 수성전 능력을 선보여 16일 동안 윤자기군의 장교 60여 명을 생포하고 2만여에 달하는 피해를 안겨주어 철수시켰다. 이를 통해 당의 영역에 남아있던 하남지역은 또 한번 지켜질 수 있었다. 3월, 윤자기는 다시 한번 대병력을 동원해 수양 공략에 나선다. 이에 수양을 지키던 --수성전의 달인-- [[장순(당나라)|장순]] 또한 방어에 나선다. 윤자기군이 도착하자 장순은 소를 잡아 잔치를 벌여 병사들의 사기를 고양시킨 다음 성문을 열고 기습에 나서 3천여 명을 죽이고 일시적으로 적을 뒤로 물렸다. 윤자기는 지치지도 않고 다시 접근해 공세에 나섰으나 장순은 남제운, 뇌만춘 등을 이끌고 윤자기의 본진을 강습, 5천여 명을 살상하고 윤자기를 포위해 사살할 뻔하기도 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이후 수양성 공방전은 10월까지 이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